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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서로에 관한 것은 우연히만 알았으면 좋겠어

Life in Korea/LOVE

by E.Jade 2022. 8. 1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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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관한 것은 우연히만 알았으면 좋겠어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휘리릭 넘겨보니 소설인 것 같아서 재미로 읽자 싶어 대여해왔다. 그런데 웬 걸. 에세이였다. 굉장히 소설 같은 에세이. 남일 같으면서도 내일 같은 책이었다.

까칠

처음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작가가 너무 예민하다고 느껴졌다. 제목에서 처럼 극세사주의 삶을 살고 있는 작가는 정말 너무나도 예민했다. 그렇게 예민하면 본인만 힘들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 주변의 몇 인물들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작가는 이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예민함의 소유자였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하고 계획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감도 큰 듯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작가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작가가 너무 신기해서 재밌게 읽어나갔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거울

처음엔 나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며 읽다보니 어느 순간 이건 내 얘기였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들이 책에 적혀있었다. 절대 나의 일기장에 길이길이 간직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낸 그녀가 나를 대변해주는 듯했다.

나는 하루 일과를 체크하며 마음을 정돈하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하지 않았다. 블라인드도 올리지 않고 화분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몸무게 측정도 패스했다. 비타민도 안 먹었다. 이미 망쳐버린 시점에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매일 굴러가고 있는 바퀴에 작은 톱니 하나가 빠진 것만으로도 나는 작동을 멈췄다. 살짝 어긋나 버린 어제의 실수로 불완전해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다시 용기를 끌어모아 세수를 하기까지, 나는 오랫동안 이불 밑에 숨어 있었다. (43-44p)


이것은 학기 처음부터 과제 제출일을 착각하고 제때에 제출하지 못한 작가가 걱정을 하면서 적은 글이다.

사실 삶은 굉장히 작은 것에 무너진다. 막상 큰일이 닥치면 생존본능 때문인지 어떻게든 무작정 뭐라도 한다. 하지만 작은 어긋남은 나를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든다. 왠지 그래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불속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해

아마 작가에게 더욱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결혼생활 중이라는 것과 해외생활 중이라는 것 덕분이었다. 2번의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일하며 지냈던 나는 해외에서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언어가 뒷받침된다면 즐거울 수 있지만, 그래도 꼭 그렇게 무너지는 일이 생긴다. 그것도 자주.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녀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불면증, 위장장애 심지어 가위눌림으로 고생하는 그녀가 편히 자고 편히 먹을 수 있길 바라게 됐다.

나는 사실 촉촉한 초코칩이다. 안 촉촉한 초코칩 나라에 살다가 촉촉한 초코칩 나라의 촉촉한 초코칩을 보고, '아, 여기가 촉촉한 초코칩들의 나라구나! 나 같은 촉촉한 초코칩이 있을 곳이 바로 여기구나!' 하여 문을 두들겼는데, 촉촉한 초코칩 문지기가 "넌 촉촉한 초코칩이 아니고 안 촉촉한 초코칩이니까 안 촉촉한 초코칩 나라에서 살아!"라고 해서 안 촉촉한 초코칩 나라로 돌아와야 했던 초코칩이다. 왜 다들 나더러 안 촉촉한 초코칩이라고 하는지 몰라서 수년간 고민할 결과 대충 이러했다. 나는 극강의 촉촉함을 담아내기 위해 겉면이 바삭해진 이른바 겉바속촉 초코칩이었다. (87-88p)


처음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다. 갑자기 웬 초코칩 타령인가 싶었다. 하지만 난 또 깨달았다. 나 또한 어릴 때 겉바속촉이었다는 것을. 어린 시절 겉바속촉으로 살아가며 오해받는 일들이 많았다. 내 주위의 촉촉한 초코칩들은 나를 보며 무심하다 말했다.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지 않아서, 먼저 안부를 물어봐주지 않아서, 여러 이유를 대며 나에게 실망했다. 초코칩 나라에 들어가려면 호들갑과 재빠름이 필요한데, 난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그들에겐 너무 건조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겉면이 촉촉해 보이는지 배우고 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상대가 나를 건조하게 느끼지만 않는다면 뭐든 괜찮았다.

그러다 미리 잡아놓은 약속들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에는 결국 사람하고 아무 말도 섞기 싫은 지경이 되었다. 가족이고 친구고 다 부질없다. 나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자기기마저 다 꺼놓은 채 완벽한 고요 속에 유영하는 시간이 절실하다. 한 마디도, 정말 단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조차 하고 싶지 않다. 눈을 찡긋거리거나 손을 흔드는 것도 싫다. 나는 홀로 있는 세상을 원한다. 동거인이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129p)


꿈이 생겼다. 돈을 벌어 견고한 요새를 짓고 한 달에 한 번만 나오며 살기. 야외활동은 뒷마당에서 하면 된다. 친구는 나가는 날 만나면 되고. 코로나가 끝나도 우리 이렇게 적당히 떨어져 살면 안 될까.

모두에게 소문내지 않았지만, 코로나는 참 괜찮은 핑곗거리였다.

나 꿈에 대해 생각해봤어. 너를 서포트하고 싶어. 나는 하고 싶은 게 많거나 몸이 모자라 야망에 우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이상을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기는 싫어. 그건 나쁘지도 않을뿐더러 굉장히 어려운 일이야. 네가 나와 다르다는 걸 알아. 그래서 난 너를 응원하며 살고 싶어. (230-231p)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남편 성실 씨의 연애시절 대답이었다. 나무와 흙의 공생 이야기.


적당히 가깝고 아주 멀리 있는 너에게

나도 이 책을 읽다 보니 편지 형식으로도 서평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네. 처음 이 책을 읽자마자 까칠하고 눈물 많은 작가를 보며 딱 네가 생각났지. 게다가 미국에서 결혼 생활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러했고.
나의 시간은 너무나도 바쁘게 흘러가는데 네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끔 안부 묻는 걸로 대신할 수밖에 없네. 그런 너에게 이 책을 소개했고 우리는 이 책을 함께 읽었어. 꼭 작가가 우리의 지인인 듯했어. 책을 읽을 때마다 서로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 라며 반박하다가 그래서 지금 작가는 어디에서 뭘 하며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했지.
대학 시절 유난히 타인을 경계하던 네가 생각나. 하지만 넌 그 누구보다 촉촉한 초코칩이었던 거야. 겉바속촉. 눈물 많은 너를 알게 되면서부턴 네가 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더라. 그러면서도 넌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 잔을 건네는 촉촉한 초코칩이었으니까. 넌 항상 안락한 집에서 머물고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생활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미국 가서도 의외로 잘 지낼 거란 생각이 들어. 물론 아주 가끔 외로울 수 있겠지만 그 외로움마저도 잘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이들을 키우며 큰 야망 없이 지내는 너를 보며 나는 내심 아쉽기도 했어. 그래서 이러쿵저러쿵 너에게 훈수를 두었는지도 몰라. 내 기억 속의 넌 여전히 야망으로 가득 차 이글이글한 눈빛을 가진 친구거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무였던 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갔나 보다 싶어. 그렇게 다른 나무를 잘 지탱해주며 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혹시 또 모르지. 네 나무의 열매에서 떨어진 씨앗이 다시 자라날 그 순간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지도. 이젠 네가 나무든 흙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 넌 그냥 너니까.
적당히 가까우면서도 아주 멀리 있는 이 관계가 난 참 좋다. 근데 물리적 거리는 조금 가까워져도 괜찮을 것 같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건강하길.
P.S. 우리도 작가 될지 모르니까 열심히 글 쓰자.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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